매일춘추/ 박영순

호수 위의 수련

 

수필가 박영순

수련은 호수에 수평을 그리고, 잔잔한 바람은 호수의 수평을 흔들고 있는 어느 여름날이었다. 수련의 잎들은 물 위를 더 올라오지 못한 채로 편편하게 얼굴을 펴고 있었다. 오로지 긴 목을 물 아래로 낮추면서 제 키를 드러내지 않았다. 호수의 수평을 그리며 물 밑으로만 커가는 수련이 너무 안쓰러웠다. 자신의 꿈을 드러내지 못하고 속으로만 애를 끓이는 여인 같았다. 그러다가 어느 날에는 화려한 꽃으로 아픈 만큼 아름답게 외출을 시도했다.

수필가 박영순 수필가 박영순

한 여자가 살다 살다가, 참고 참다가 끝내는 암이란 꽃을 피운 것처럼. 수련의 꽃피움을 마음 아파해 본 날이었다. 아름다운 것은 혹독하리만치 힘든 과정이 있고 난 뒤에야 주어지는 보상인 지도 모른다. 수련이라고 제 키를 물 밑으로 감추고만 싶었을까. 키재기 하듯 높이 올라오고 싶었을 것이지만 호수가 더 돋보이기를, 자신보다 더 이름답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잎들은 일제히 수평을 그리며 웃었다. 자신은 주인공이 아니어도 좋았고, 벗이 행복하면 자신도 흐뭇하다고 생각했다. 초록으로 물 위를 수놓는 수련에게서 겸손의 미덕을 배운 날이기도 했다. 주위를 아름답게 하는 희생을 보고 욕심만 채우려고 산 날을 후회 했다. 수련은 호수만 생각하다 자신에게 쌓인 아픔조차도 호수를 위해 바치고 싶었던 것이다.

오랫동안 내면의 깊이를 다지느라 심한 통증을 느꼈으며, 결국 살이 붓고 터지더니 이어서 꽃으로 피어났다. 날카로운 꽃잎들이야말로 수련의 내면에 아픔이 겹겹이 쌓여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리라. 화려한 외출로 수련이 호수를 더욱 멋지게 하자, 구경하러 오는 이가 많아져 호수가 금방 유명해졌다. 그 때부터 사람들은 수련의 꽃잔치를 자랑했다. 얼마나 아픈 고통이 있었는지를 말해줘도 알아듣지 못했다. 수련의 짧은 꽃잔치가 끝나고 다시 호수의 수평을 그리는 푸른 잎들이 잔물결에 흔들릴 뿐 그 수위를 오르내리지 않았다.

한 여자가 살아낸 흔적이 수련과 같았을 때, 그녀는 암이란 화려한 꽃을 피어낸 것일까. 함께 한 벗이 유방암이란 충격적인 소식을 전해왔다. 호숫가에 큰 파문이 일었는데도 수련의 잎은 잔잔한 물결로 수평을 잡고 있었다. 수련과도 같은 친구라서 더욱 안타까웠고, 서울을 오가며 암 투병하는 그녀에게 '용기를 잃지 말라'는 문자를 보내며 흐느꼈다. 방사선 치료를 받으러 가면서도 내가 안부를 묻기 전에 먼저 전화를 하는 친구였다. 아직도 수련처럼 가슴 안으로만 키를 자라게 하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나처럼 속이 덜 영글어 이렇게 해도, 저렇게 해도 속에 담지 않고 조금 모자란 듯 살면 좋으련만. 이제 호수에 수평을 그리지 말고 호수 위를 마음대로 올라와 자신을 위해 사는 날이 많아졌으면 좋겠다. 수련이 물 위로 높이 커 올라와도 그대로 아름다운 호수라고 말해 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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